필사의 즐거움
2025.04.17
w0nder

<link-preview url="https://www.instagram.com/walk.0ng/p/DH-VslTTcqM/?img_index=1" title="필사와 함께 찾는 나만의 별" target="_blank" image="/posts/17/assets/post.jpg" >
</link-preview>
어린왕자 필사 모임에 참여했다.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운영자](https://www.instagram.com/resonance.library/) 분이 준비해 주신 어린왕자의 일부분을 함께 필사하는 시간이었다. 우리 여섯 명이 하나의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그 후 함께 보이차를 마시며 대추 간식을 먹는 편안한 시간을 가졌다. 보이차의 깊은 향과 대추의 달콤한 맛이 어우러져 참 맛있었다. 차를 마신 후에는 짧은 명상을 했다.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는 5분간의 시간이었다. 명상이 끝난 후, 본격적인 필사를 시작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종이는 왼쪽에는 어린왕자의 문장들이, 오른쪽에는 글을 쓸 수 있는 줄이 있는 형태였다.
사실 나는 글씨를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악필이다. 초등학교 시절, 내 글씨체를 보신 부모님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러다 나중에 이력서는 어떻게 쓰려고 그러니?"라고 물으셨다. 그때 나는 당차게 대답했다. "미래에는 컴퓨터로 할 거라서 글씨 못 써도 돼요." 어린 나이에 나름의 선견지명이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정말로 컴퓨터로 밥을 먹고 살고 있다. 학창 시절을 제외하고는 펜을 쓸 일이 거의 없었다. 솔직히 학창 시절에도 최대한 잘 쓰지 않으려 했지만...
그러다 최근에 아침 일기, 이른바 '모닝페이지'를 시작하면서 손으로 글을 쓰는 행위에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필사에도 호기심이 생겼고, 주저 없이 이번 어린왕자 필사 모임에 신청했다.
모임에서 펜을 들고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깨달았다. 시간이 지나도 내 악필은 자연적으로 고쳐지지 않았다는 것을. 어쩌면 더 나빠졌을지도 모르겠다. 컴퓨터 키보드만 두드리며 살아온 세월이 내 손글씨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았다.
필사에는 여러 목표가 있다고 한다. 마음을 비우거나, 좋은 글귀를 마음속에 새기거나, 글쓰기 연습을 하거나, 혹은 악필을 고치는 등 다양한 목적이 있을 수 있다. 나는 필사 내내 이런 목표들을 하나씩 시험해 보았다. 그러나 어떤 것도 내게 딱 맞는 느낌은 아니었다.
나는 MBTI에서 특히 N이 강한 편이다. 극대 N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내 머릿속은 항상 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현실보다는 가능성의 세계에 더 많이 머무른다.
망상을 잘하고, 또 그것을 즐긴다. 일상적인 사물을 보더라도 여러 갈래의 생각이 뻗어나가고, 어떤 단어 하나에도 수십 개의 이미지와 이야기가 연결된다. 내 머릿속은 끊임없이 분주하다. 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낯선 이의 표정에서 그의 하루를 상상하거나, 카페에서 우연히 들린 대화 조각으로 전체 서사를 구성한다. 특히 밤하늘의 별을 볼 때면 그 별에 살고 있을지 모르는 존재들의 일상을 그려보는 것이 취미다.
때로는 망상이 나를 힘들게 할 때도 있다. 걱정이 너무 깊어져 현실에서 발을 딛기 어려울 때, 지나친 상상이 불안으로 이어질 때가 그렇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을 좋아한다. 현실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그 느낌은 어떤 경험보다도 특별하다.
꿈꾸는 것도 특히 좋아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전날 꾼 꿈이 생생하게 기억난다면, 베개에 머리를 묻은 채 꿈속 장면들을 하나하나 되새김질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 과정이 너무 즐겁다. 현실이면서 현실이 아닌, 혹은 현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것이 매력적이다. 특히 내 무의식이 만들어낸 세계라는 점, 그것도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내 머리에서 저절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꿈이 기억나는 날이면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이 남다르다. 마치 한 권의 영화나 책을 혼자만 경험한 것 같은 특별함이 있다.
그렇게 나는 필사를 하면서 나만의 방식을 찾기로 했다. 바로 '망상을 즐기며 필사하기'. 어린왕자의 한 구절을 옮기면서 여러 생각을 펼치고, 그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불러오고, 그렇게 사고가 저 멀리 날아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여정을 즐기기로 했다.
어린왕자의 가장 유명한 첫 내용은 보아뱀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이 어렸을 때 보아뱀이 코끼리를 삼키는 그림을 그렸지만, 어른들은 아무도 그것을 보아뱀으로 알아보지 못했다. 모두 모자로만 봤다는 이야기.
그 부분을 필사하면서 나는 망상을 시작했다. 내가 먹는 밥이 IT 분야인지라, 자연스럽게 UX/UI 디자이너들의 고민과 연결 지었다. UX/UI 디자이너들은 사용자들이 별다른 설명 없이도 인터페이스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기를 원한다. 그것이 잘 된 디자인의 기준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어린왕자의 주인공인 조종사는 사실 잘못된 디자인을 한 셈이다. 보아뱀이 코끼리를 삼킨 그림을 보면 누구나 바로 알아볼 수 있게 표현했어야 했는데, 너무 추상적이고 직관적이지 않은 디자인을 했으니 말이다.
이런 식으로 필사를 하는 동안, 내 생각은 계속해서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때로는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때로는 최근 읽은 책의 내용으로, 또 때로는 완전히 엉뚱한 상상의 나래로. 그리고 이런 망상의 시간이 의외로 즐거웠다. 필사라는 일견 단순하고 지루할 수 있는 행위가, 나에게는 풍요로운 상상의 시간이 되었다.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필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었다. 필사는 단순히 글씨를 예쁘게 쓰거나 문장을 암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글과 교감하는 시간일 수 있다는 것을. 어쩌면 내 악필은 앞으로도 고쳐지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필사의 즐거움을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가끔씩 좋은 책의 일부를 필사하며 나만의 망상 여행을 떠날 생각이다. 이번 어린왕자 필사 모임은 내게 새로운 취미와 자기 표현의 방식을 선물해 주었다. 악필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 악필이 오히려 나를 글씨의 완벽함에서 해방시켜 더 자유롭게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 수 있게 했는지도 모른다.
어린왕자가 말했듯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필사의 진정한 가치는 완벽한 글씨나 외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자유로운 사고의 여행과 자신만의 내면의 목소리를 발견하는 데 있지 않을까. 결국 중요한 건 남들이 정해놓은 방식이 아닌, 자신만의 고유한 즐거움을 찾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