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리야르가 ChatGPT를 만났다면

2025.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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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매일 AI와 대화를 나눈다. 별일도 아닌 것들을 묻고, 가끔은 고민을 털어놓기도 한다. 이 AI는 말도 잘하고, 예의도 바르며, 어떤 때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 같기도 하다. 뭔가를 설명할 땐 놀라울 만큼 정확하고, 때때로 나를 위로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득,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었다. 'AI와의 이 대화가 정말 진짜일까? 아니면 진짜처럼 보이는 무언가에 내가 속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개발자로서 그 뒤편의 메커니즘을 알고 있지만, 일반 사용자들에게는 이런 의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질문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감각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세상은 점점 더 매끄럽고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내가 접하는 것들—사람들의 말, 이미지, 이야기들—모두 어디선가 본 듯하고, 어디론가 연결되지 않은 채 둥둥 떠 있는 느낌을 준다. 의미는 넘치도록 많은데, 정작 그 의미들이 가리키는 '무언가'는 자꾸만 사라진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말이 떠오른다. 보드리야르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복제와 이미지, 모사와 재현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미지들이 이제는 원본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예전에는 그림이 현실을 모사했고, 사진이 특정한 순간을 담아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이미지들은 더 이상 어떤 실제를 반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 자체가 현실처럼 작동한다. 광고 속 이상적인 삶, 소셜 미디어 속 편집된 일상, 가상 인플루언서의 미소는 더 이상 어떤 실제를 반영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일 뿐이다. 보드리야르는 이런 상태를 '시뮬라르크'라고 불렀다. 원본 없는 복제.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가짜. 이런 개념을 듣다 보면, 지금 우리가 매일같이 대화하는 생성형 AI, 특히 LLM—대형언어모델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ChatGPT, Claude, Gemini 같은 AI와 이야기하다 보면, 그들의 말은 정말 사람 같다. 문장이 자연스럽고, 질문에 대한 반응도 빠르고, 때때로 감동적인 표현마저 등장한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들이 경험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사랑도 고통도 모른다. 추억도 없고, 감정도 없다. 어떤 생각도 스스로 하지 않는다. 그저 인간 언어의 패턴을 통계적으로 분석해, 가장 가능성 높은 문장을 그럴듯하게 이어 붙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겉보기엔 사람의 말과 다르지 않지만, 실제로는 아무 의미도 지시하지 않는 기호들의 조합에 불과하다. 그 안에는 사람이 없다. 살아 있는 목소리는 없다. 그저 말처럼 보이는 말, 감정처럼 보이는 감정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걸까. 현실은 있지만, 현실처럼 보이는 것들이 훨씬 더 강력하게 작동하는 세계. 편집된 유튜브 영상이 실제 삶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지고, 필터를 씌운 셀카가 오히려 익숙한 얼굴처럼 다가오며, 감정 없는 AI가 만들어낸 문장이 어떤 사람의 위로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상황. 이것이 보드리야르가 말한 '하이퍼리얼(hyperreal)'이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것들이 우리 주변을 감싸고, 진짜는 점점 흐려져간다.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를 예로 들며 말했다. 디즈니랜드는 환상의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이 얼마나 환상에 가까운지를 감추기 위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진짜처럼 보이는 구조 속에서 우리를 안심시키는 장치라는 말이다. 지금의 SNS, 미디어, 그리고 AI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것들을 통해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현실처럼 꾸며진 이미지들의 무한한 교환 속에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비판이나 풍자도 점점 의미를 잃는다. 비판은 어떤 기준점이 있을 때 가능하다. 현실과의 거리감이 있을 때, 풍자도 날카로워질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기준점 자체가 희미해졌고, 현실은 더 이상 하나의 실체가 아니다. 모든 것이 복제되고, 각자의 이미지로 소비된다. 정치적 사건도, 사회적 재난도, 감동적인 이야기조차도 모두 이미지화되어 소비될 뿐이다. LLM이 만들어낸 문장들도 마찬가지다. 겉보기엔 진지하고 사려 깊은 말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어떤 주체도 없다. 어떤 의도도 없다. 그저 과거의 말들을 조합해 만든 문장일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복잡한 문제가 드러난다. 이들이 학습한 '과거의 말들'은 결국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들, 인터넷에 자신의 생각을 남길 수 있는 특정 집단의 언어 패턴에 불과하다. 어쩌면 서술을 하는 사람들 일부가 모든 인류를 대변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편향된 시각이 마치 보편적 진리인 양 재현되고,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말을 듣고 안심하고, 감동하고, 때로는 방향을 결정한다. 그 순간, 우리는 시뮬라시옹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보드리야르는 냉소적으로 말한다. 더 이상 희망도, 회복도, 구원도 없다고. 종말마저 끝났다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의 이런 단호함에서 오히려 묘한 위로를 받는다. 진짜라고 믿어온 것들이 실은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당황스럽지만, 동시에 어떤 해방감을 준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지금 내 곁에 있는 것, 진짜인지 아닌지 모를 어떤 장면, 누군가의 말, 나의 감정조차도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LLM은 분명 시뮬라르크다. 우리는 시뮬라시옹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진짜'를 찾는다. 진짜가 아니어도 좋다. 진짜 _같은_ 무언가라도, 그 순간 나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것이 어쩌면 우리가 이 시대에 붙잡을 수 있는 최선의 진짜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