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
같은 책을 두 번 읽으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영화도 그렇다. 똑같은 장면인데, 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표정 하나, 대사 한 줄이 어느 날 갑자기 다른 무게로 들어온다. 작품이 달라진 게 아니다. 내가 달라진 것이다. 특히 인물을 보는 눈이 그렇다. 한때 빌런처럼 보였던 사람이, 다시 보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냉정하고 계산적으로만 보였는데, 어느 순간 오히려 현실을 가장 잘 보고 있던 사람처럼 보인다. 그 사람이 달라진 게 아니다. 내가 조금 더 많은 것을 겪었다. --- 요즘 유튜브에서 영화 〈1승〉의 짧은 장면이 자주 보인다. 구단주 강정원은 얼핏 전형적인 빌런처럼 보인다. 배구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팀을 사고, 엉뚱한 판단을 내리고, 때로는 가볍게 보인다. 현장을 모르는 윗사람, 스포츠 영화에 늘 나오는 그 사람처럼 보이기 쉽다. 그런데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다른 생각을 했다. 저 사람은 일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굴러가게 만드는 사람에 가까운 것 아닐까. ---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선수가 부족하다고 하자 경력 있는 선수를 사라고 한다. 운영자금이 없다고 하자 선수를 팔라고 한다. 팔 선수가 없다고 하자 싼 선수들을 묶어서 떨이로 팔라고 한다. 그것도 없다고 하자, 잠깐 멈추더니 묻는다. 그나마 괜찮은 포지션이 어디냐고. 리베로라는 대답이 돌아오자, 리베로가 약한 팀이 어디냐고 묻는다. 파이브스타즈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말한다. 그럼 거기 가서 팔아오겠다고. 막힐 때마다 같은 방향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냥 다른 쪽으로 돌아간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 장면에서 구단주가 답답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보인다. 정말 답답한 건 그다음이다. 안 되는 이유를 늘어놓고는 거기서 멈춰버린다. --- 물론 안 되는 이유는 대부분 사실이다. 예산이 없고, 시간이 부족하고, 규정이 있고, 사람이 없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고 싶은 게 아니다. 문제는 거기서 멈추느냐, 다른 쪽으로 돌아가느냐다. 사실 나도 그런 사람이었던 적이 있다. 막히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서 멈추던 사람. --- 개발자들 사이에 이런 농담이 있다. "개발자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종족이다." 이유는 있다. 시스템은 복잡하고, 작은 변화 하나에도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긴다. 무엇이 망가질지, 어디서 문제가 생길지, 어떤 비용이 숨어 있는지 먼저 따져보는 것은 중요한 능력이다. 하지만 막힌 길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과, 다른 길을 찾는 것은 다른 일이다. --- 여러 회사를 다니고 여러 자리에서 일하면서 비슷한 장면을 자주 봤다. 예전에는 대표들이 왜 저런 결정을 내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 저렇게 단순하게 구는지, 왜 저렇게 무리해 보이는 요구를 하는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조직 안에는 언제나 안 되는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틀린 말을 하지 않는다.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다만 그 말이 조직을 앞으로 움직이게 만들지는 않는다. --- 냉정해 보이고, 단순해 보이고, 무모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판을 키우고, 막힐 때마다 다른 쪽으로 돌아서면서 조직을 앞으로 밀어간다. 같은 영화를 다시 보듯, 같은 사람을 다시 본다. 처음에는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처럼 보였는데, 돌이켜보면 문제 앞에서 멈추지 않던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 사람들은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냥 다른 길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