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관대하다
많은 시간을 들여 강의를 준비했다. 슬라이드를 다듬고, 예시를 고르고,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연습했다. 그러나 막상 강단에 서자 모든 것이 어긋났다. 말은 자꾸 꼬였고, 순서는 뒤섞였으며, 준비한 예시는 엉뚱한 순간에 튀어나왔다. 나는 속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첫 강의니까, 누구나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만약 다른 강사가 같은 실수를 했다면 나는 과연 같은 말을 했을까? 아마 "준비가 부족했군"이라고 냉정히 평가했을 것이다. 그 순간, 남의 어설픔에는 엄격하면서 내 어설픔에는 관대한 나 자신을 마주했다. 이 이중 잣대는 강의실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식당에서 음식이 늦게 나오면 우리는 금세 불친절을 떠올리지만, 내가 약속에 늦으면 교통 체증과 돌발 변수를 탓한다. 동료가 발표를 망치면 준비 부족을 의심하면서도, 내가 같은 상황에 처하면 바쁜 일정을 이유로 든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 심리학은 이런 현상을 오래전부터 설명해왔다. 사회심리학자 리 로스가 1970년대에 제시한 기본 귀인 오류가 대표적이다.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해석할 때 상황보다 성격이나 능력을 과도하게 강조한다. 발표를 망친 동료를 보면 곧장 "준비가 부족하다"고 단정하지만, 내가 같은 실수를 하면 "시간이 모자랐다"는 상황을 먼저 떠올린다. 여기에 자기편향이 겹쳐진다. 성공은 내 능력 덕분이고, 실패는 외부 탓이라고 믿는 태도다. 프로젝트가 잘되면 "내가 잘해서"라고 말하면서, 실패하면 "운이 나빴다"고 여긴다. 이는 자존감을 지켜주는 방패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책임을 회피하게 만드는 함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심리적 편향은 단순한 버릇이 아니다.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자기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하면 자존감은 쉽게 무너지고, 타인에게 지나치게 관대하면 경쟁에서 밀려날 위험이 크다. 나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태도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 살아남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발달시킨 심리적 방어 장치인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착각이 모두에게 동시에 일어난다는 점이다. 교통체증에 갇힌 운전자들이 하나같이 "막히는 건 다 남 때문"이라 믿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자신이 예외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 집단 전체는 같은 모순을 반복한다. 인터넷 리뷰 문화도 다르지 않다. 소비자일 때 우리는 서비스 제공자에게 완벽을 요구하지만, 제공자의 자리에 서면 사정을 호소한다. 사정이 있었다, 상황이 힘들었다고. 우리는 끊임없이 평가자와 피평가자의 자리를 오가며 살지만, 그때마다 잣대는 극적으로 달라진다. 모두가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사회의 보편적 진실이 된다. 이 보편적 진실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자신에게만은 관대한 기준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불필요한 갈등과 오해를 반복한다. 이런 이중 잣대가 쌓이면 사회 전체의 신뢰가 훼손된다. 서로를 의심하고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결국 아무도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게 된다. 모두가 실수를 두려워하며 움츠러든다. 그렇다면 이 악순환을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남에게 관대해지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미덕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수많은 순간, 타인의 관용 덕분에 버텨왔다. 내 어설픔을 이해해 준 누군가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그 관용을 돌려줄 차례다. 내가 내게 부여했던 사정을 남에게도 허용할 때, 관계는 단절되지 않고 이어진다. 관대함은 실수를 덮어주거나 책임을 면제해주는 일이 아니다. 상대의 어설픔 속에서도 맥락을 상상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할 가능성을 신뢰하는 태도다. 완벽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하지만, 불완전함을 견뎌내며 함께 나아가는 태도는 가능하다. 그런 작은 관대함이 개입하는 관계는 오히려 더 단단해진다. 더 나아가 관대함은 사회적 신뢰를 쌓는 방식이기도 하다. 타인의 어설픔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불신 대신 신뢰를, 고립 대신 연대를 선택한다. 관대함은 결국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내가 내게 허용한 변명을 남에게도 내어줄 때, 우리는 각자의 불완전함 속에서도 함께 살아갈 힘을 얻는다. 결국 우리 모두는 같은 조건 속에 있다. 완벽을 요구할 수 없는 존재들, 실수와 어설픔이 삶의 일부인 존재들. 그렇다면 결론은 분명하다. 나에게처럼, 남에게도 관대해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