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바이브 소송

JAN 16, 20266분

"바이브 코딩"이라는 말이 있다. 개발자가 깊은 고민 없이 직관과 느낌만으로 코딩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제 법률 분야에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나는 이걸 '바이브 소송'이라고 부르고 싶다. 한 트윗에서 사기 피해액이 870만 원인데 변호사 수임료가 최소 150만 원이라는 말을 듣고 AI의 도움으로 셀프 소송을 진행해 승소했다는 내용을 보았다. 피해액의 17%가 넘는 수임료 때문에 포기할 뻔했던 소송을 AI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것이 단순한 개인의 성공담을 넘어, 우리 사회 전체에 큰 변화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세히 보면 법률 업무의 상당 부분은 반복적인 패턴을 가지고 있다. 소액 사기, 임금 체불, 보증금 반환 등 일상적인 분쟁들은 비슷한 절차와 서식을 따른다. 실제로 많은 블로그들이 이런 소액 분쟁을 해결하는 법적 절차를 쉽고 상세히 다루고 있다. 만약 AI가 "이런이런 소송하고 싶어, 어떻게 해야 해?"라는 질문에 관련 사례를 찾아주고, 맞춤형 서식을 만들어주며, 제출 방법까지 안내해준다면? 수백만 원의 비용 장벽 때문에 포기했던 정당한 권리 구제가 가능해진다. 이런 가능성은 법률뿐만 아니라 행정 분야로도 확장될 수 있다. 바이브 소송, 바이브 납세, 바이브 행정 툴들을 만들 수 있다. 어차피 반복되는 비슷한 케이스들이 많을 텐데, 미리 문서를 준비해두고 "나 이런이런 소송하고 싶어, 어떻게 해야 해?"라고 하면 사례를 찾아서 관련 문서 서식을 만들어주고, "이거 어디에 업로드해야 해?"라고 물으면 제출 방법까지 안내해주는 식이다. 그러면 그걸 업로드하고 신청하면 된다. 이제 전자 행정보다는 AI 행정, 바이브 행정이라고 부르는 시대가 왔으면 한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도 낳을 것 같다. 내가 최근 다문화 가정에 IT 개발 교육을 하는 비영리 사단법인 설립 과정에 참여했다. 행정사나 법무사 없이 AI의 도움만으로 서류를 준비하고 진행하려 했지만, 공무원과 여러 차례 서류를 주고받는 일이 발생했다. 종이로 내야 해서 프린트도 여러 번 하고, 관련인들이 다시 모여서 도장을 찍고, 인감증명서가 모자라서 다시 추가 발급받아 오는 등 너무나도 많은 시간과 종이 낭비를 했다. AI의 도움을 받아 바이브 행정을 진행하면서 서류를 명확하지 않게 준비하고 신청하게 되자, 나는 저비용으로 진행할 수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그 모든 비용은 행정 비용으로 전가되었다. 내 시간도 추가로 소비되었지만, 그보다 담당 행정 인력의 시간이 훨씬 더 많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기존에는 행정사나 법무사 같은 전문가들이 관련 법령과 서식을 정확히 알고 서류를 작성했기 때문에, 심사 과정에서도 일정한 신뢰도가 전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AI 도구를 활용한 일반인의 직접 신청이 늘어나면서, 제출 서류에 대한 더 꼼꼼한 검증이 필요해진 상황이다. 결과적으로 행정 처리 시간이 길어지고, 공무원 업무량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이는 AI로 인해 법률 서비스 비용은 줄어들지만, 대신 행정 비용이 증가해 결국 세금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이 150만 원을 절약하는 대신, 사회 전체가 그 비용을 나눠 부담하게 되는 구조다. 이런 문제는 우리나라의 행정 시스템이 가진 구조적 한계와도 맞물려 있다. 대한민국은 전자정부 순위에서 상위권을 차지할 만큼 전자행정이 발달했다고 평가받지만, 실제로는 아직도 종이 기반의 행정 절차가 상당 부분 남아있다. 온라인으로 신청을 받더라도 최종 제출은 종이 서류를 요구하거나, 전자 문서와 함께 원본 서류를 별도로 제출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런 이중 확인 시스템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본인확인 강화, 서류 위조 방지, 비대면 업무 진행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보안 리스크 차단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AI 시대에는 이런 보수적 접근이 오히려 혁신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AI 시대에 더 나은 기술을 만들려면 모델 자체를 보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AI가 우리 일상과 업무에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려면 모델 그 자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융합 가능한 기반 서비스들이다. 바이브 소송이나 바이브 행정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단순히 AI가 문서를 잘 작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앞서 '바이브 소송' 이야기를 했을 때, 핵심은 AI가 소장을 잘 쓰는 능력만이 아니었다. 법률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하고, 관련 판례를 찾고, 법원 시스템에 제출하는 일련의 과정이 매끄럽게 연결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는 마치 스마트폰 생태계와 비슷하다. 아이폰이 성공한 이유는 단지 하드웨어가 좋아서가 아니라, App Store라는 플랫폼과 수많은 API들이 개발자들이 쉽게 다양한 앱을 만들 수 있게 해줬기 때문이다. 최근 등장한 MCP(Model Context Protocol) 같은 프로토콜은 이런 맥락에서 주목할 만하다. 다양한 서비스들이 AI 모델과 소통할 수 있는 표준화된 인터페이스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AI는 단순히 텍스트를 생성하는 것을 넘어서, 실제로 외부 시스템과 상호작용하며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미래에는 AI 에이전트들이 서로 협업하는 '에이전트 경제'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법무 에이전트가 회계 에이전트와 협업해서 세무 이슈가 포함된 계약서를 검토하고, 필요시 번역 에이전트의 도움을 받아 국제 계약도 처리하는 식이다.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각 분야의 전문 서비스들이 AI 친화적인 API를 제공해야 한다. 단순히 사람이 웹사이트에서 클릭하는 인터페이스가 아니라, 프로그래밍적으로 접근 가능한 구조화된 인터페이스여야 한다. 결국 AI 시대의 기술 주권은 단순히 좋은 모델을 가지는 것만이 아니다. 내 나라의 시스템들이 AI와 얼마나 잘 융합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융합을 통해 얼마나 혁신적인 서비스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모델은 글로벌 경쟁이지만, 기반 서비스와의 융합은 각국의 고유한 영역이다. 한국만의 독특한 서비스 생태계와 AI의 만남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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